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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찾아온 강추위, 샤르르 녹여준 따뜻한 사람들

도시를 떠나는 꿈

by 채색 2012. 4. 14.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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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래면에서 백운면으로 넘어가는 고개에서 눈을 만났다. “우리, 서울에서 눈올 때 손잡고 걷는게 소원이었는데!” 유하가 말했다. 지나가는 차도 거의 없어 손을 잡고 걸었다. 큰 배낭이 걸리적 거렸지만 ‘이정도야 뭐!’ 비탈길 옆의 숲이 정말 아름다웠다. “이제서야 자연을 만끽하는구나!” 기쁨의 큰 숨을 내쉬며 말했다. 늘 설레는 날들이었지만 이 순간 유독 더 설레였다. 이게 추위의 시작인지도 모른채.


완만한 내리막의 연속이었다. 차도 많지않아 쾌적한 걸음이었다. 다만 점심을 해먹을 땐 찬 바람이 힘들게 하기도 했다. 목적으로 했던 백운면에는 늦지않게 도착했다. 백운성당의 문을 두드려 잠자리를 부탁했다. 이것도 어렵지 않게 성공! 마침 토요일 특전미사가 있어 미사에도 참가해 기도를 했다. ‘이 세상 모든 것에 평화가 깃들길~’


새벽에 일어나 먼저 방 문을 연 유하가 말했다. “채색, 밖에 나와봐, 눈이 쌓여있어.” 바깥에는 눈이 소복이 쌓여있었다. ‘3월에 눈이라...’ 걸음을 옮길 때마다 뽀도독 뽀도독 소리가 났다. 다행히 새벽녘의 시퍼런 하늘이 이미 드러나 있었고, 두둥실 떠 있는 구름이 서서히 붉어지는 것도 보였기 때문에 걷기엔 무리가 없었다. 오늘은 박달재를 넘어 제천으로 가는 것이 목표.


박달재 아래로는 고속화 국도가 터널을 뚫고 지나갔다. 박달재 옛길 입구까지는 고속화 국도의 일부를 통과해야만 했다. 눈길에 조심스레 다니는 차량들이 혹여나 우리쪽으로 미끄러질까 무서웠다. 옛길 입구의 일주문은 어찌나 화려한지. 안내판에는 박달재의 전설을 적어놓은 것이 있었는데, 후대에 지어낸 이야기가 분명해 보였다. ‘박달재’라는 고개는 여러곳에서 봤었고, ‘박달’이라는 이름을 가진 청년이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들이 고속화 국도로 다 빠진 덕분에 고갯길을 넘어가는 도로엔 차가 거의 없었다. 포장이 된 어설픈 숲길이긴 했지만 나름 운치가 있었다. 길에는 오소리 발자국이 계속 이어졌다. 전날 눈이 내려 쌓인 것을 감안하면 우리가 도착하기 바로 전에 지나간 것이 틀림없었다. 도로를 가로지르기도 하고 숲으로 들어가거나 난간 바깥쪽으로 나갔다가 들어오기도 했다. 그의 ‘귀여운’ 행동을 상상하며 발자국을 쫓다보니 어느새 박달재에 도착. 고갯마루엔 차고 거센 바람이 불고있었다.


내리막은 어렵지 않게 내려갔다. 중간중간에 쌓인 눈을 피하려 애쓰는게 좀 힘들긴 했다. 결국엔 출구 일주문 앞에서 발바닥이 하늘을 올려다 볼만큼 콰당하고 넘어졌다. 미끄러질 것 같은 느낌이 왔을 때 낙법을 쓰듯 뒤로 넘어진 것이다. 배낭에는 매트와 침낭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괜찮아?”하며 다가오던 유하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쭉~ 미끄러졌다. 슬라이딩~



▲ 백운면으로 넘어가는 길에 만난 숲, 이제서야 수도권을 벗어난 것 같다.


▲ 개들은 우리를 지날 때 크게 짖는다. 이 개는 우릴두고 미치도록 짖었다.


▲ 구불구불했던 시골길. 


▲ 백운성당 교육관에서 바라본 바깥풍경. 3월 중순임에도 눈이 소복이 쌓였다.


▲ 박달재 고갯길.


▲ 박달재 일주문. 일주문 그늘아래 얼음에서 미끌어졌다.


제천 도착 바로 전 도시인 봉양읍에 닿았다. 기온이 굉장히 떨어져 있는 상태에다 바람이 거셌다. 점심을 먹을 장소를 찾았지만 마땅치 않았다.  큰 도로가 도시를 가로지르고 있었기 때문인지 ‘읍’만큼의 규모가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기차가 하루에 손에 꼽을만큼 멈추는 봉양역에서 점심을 떼웠다. 전날 감자를 미리 삶아온 것이다.


열 댓평이나 될 까한 자그마한 기차역, 오가는 사람도 매우 드물었다. “우리 꼭 영화속에 들어간 것 같지않아?” 내가 상기된 얼굴로 물어봤다. 유하도 “그치? 여행영화!” 서로 웃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역을 나설 땐 추위가 두려웠다. 옷을 껴 입었는데도 추위를 이겨낼 방도가 없었다. 평소엔 버스정류장이 쉼터였지만 이 때는 구세주였다. 곧 제천으로 향하는 버스가 왔고 주저없이 탔다. 마침 제천까지의 길은 험한 자동차길 외에는 걷기에 적당한 길도 없었다.


유하의 지인인 한대우님은 우리에게 의림동 성당에 가는것을 추천했다. 그곳에 잘 아는 신부님이 있기 때문에 재워줄거라고 했다. 한대우님은 유하의 언니들은 물론 어머니와도 아는 관계로 오랫동안 알고, 친하게 지내왔다고 한다. 버스에서 내려 의림동 성당까지 가는 길은 ‘얼음길’이었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걷는데도 땀하나 흘리지 않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한대우님이 소개시켜준 최종권 후고 신부님. 그는 우릴보고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반가이 맞아주었다. 우리와 비슷한 또래의 젊은 신부님이었는데 열정이 그를 감싸고 있는 듯 했다. 아니나 다를까 신부님도 50일이 넘는 기간동안 홀로 도보여행을 한 경험이 있는 것이었다! “신부가 되기 전에 고민이 많았어요. 그 때 도보여행을 하며 마음을 다졌죠.” 가재는 게편이라고 했던가? 


낮 동안에는 그를 따라 배론성지를 다녀왔다. 교리교사들이 교육을 받은 뒤 마치고 나오는 날이었던 것이다. 행사가 끝마칠 때까지 그곳을 둘러보았다. 한국에서 천주교가 박해당한 역사들이 현장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결국 이곳에서도 추위를 못이기고 추위를 피하려 따뜻한 곳을 찾았다. 서점에 들어가 책을 구경한 것. 눈에 띤 것은 단연 프란치스코 성인의 일대기였다. 모든 자연물을 인격화 시켰던 그의 마음씨에 감동했다. 바람 형, 바다 아빠, 나무 동생, 나비 누나...


성당으로 돌아온 뒤, 후고 신부님은 성당에 씻을 곳이 없다며 바로 앞 목욕탕엘 다녀오라고 했다. “우리 성당 신자님이 하는 곳인데 제가 같이가면 목욕비를 안받을 수도 있으니까요. 이 돈으로 가세요.” 우리도 돈이 있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이 정도는 해드리고 싶어요.”라는 신부님의 따뜻함을 뿌리치고 싶진 않았다.


추위에 ‘쩔은’ 상태로 욕탕에 들어가니, 되려 부들부들 떨리는 느낌이었다. 그저 물일 뿐이었지만 그 속에는 따뜻한 마음까지도 녹아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허벅지 뒤쪽이 간질간질하고 따끔거리는게 동상증세였다. 박달재를 넘으며 차고 센 바람을 너무 쐰 까닭일까? 신부님의 따뜻함이 아니었다면 동상이 악화될 뻔 했다.


목욕을 마치고 나오니 희소식이 또하나 기다리고 있었다. 한대우님과 유하의 ‘짝은언니’가 온다는 것이다. 그들은 원주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제천과 멀지않았던 것이다. 젖은 머리의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 그들, 채식을 하는 우릴위해 안내한 식당은 산초두부가 맛난 집이었다.


대우님은 산초두부 구이와 두부전골을 넉넉하게 주문했다. ‘단백질’이 부족해진 우릴 위해서란다. 우리가 육고기를 먹는다면 그런 집으로 안내해 ‘단백질’을 보충해줬겠지만 그럴 수 없으니 “두부라도 많이 드세요.”란다. 우린 그 보답으로 짧은 여행이었지만, 여행에서 있었던 일을 즐겁게 이야기해 주었다.



▲ 배론성지의 최양업 신부 동상.


▲ 배론성지. 골짜기가 배 밑바닥처럼 생겼다고 해서 '배론'이라고 붙여졌다고 한다.



추위를 피하려 퇴직 후에도 두달을 기다려 떠났다. 부산사람인 나로서는 3월이면 분명 따뜻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른 삼월에 영하 10도를 넘나드는 추위는 적응이 힘들었다. 특히나 무거운 짐을 지고도, 두꺼운 오리털 점퍼를 입고 걷는데도 땀이 나지않는 이런 추위 말이다. 


세상은 음양의 조화로 생겨났다고 했던가? 강한 추위는 따뜻한 사람들의 배려로 피할 수 있었다. 앞으로 또다시 추위가 찾아와도 그들을 생각하면 절로 따뜻해질 것만 같다. 추워질 때면 ‘후고 신부님의 목욕탕, 한대우님의 산초두부’를 떠올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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