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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 '양은이'와 맞짱 뜬 아저씨

도시를 떠나는 꿈

by 채색 2012. 12. 26.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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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길을 오래 걸었던 탓인지 4차선인 국도 7호선만 남고 작은 도로는 모두 사라져버렸다. 불안불안 한 길을 걷고 또 걸어서 도착한 곳은 남애리였다. 사실 그 전에 멈추고 싶었지만 밥해먹을 버너용 기름(휘발유)이 없었기에 주유소가 있는 그곳까지 가야만 했던 것이다. 


강변 제방 같은, 옛 동해선 철도길 너머에 있는 해변은 왠지 불안해보였다. 뼈대만 남은 천막들과 ‘접근금지’ 팻말이 붙어있는 휑한 방갈로 숙소들이 그렇게 느끼게 만들었다. 여름을 제외하곤 을씨년스러움만 감도는 곳이었다. 더 걷기엔 이미 늦었기에 더 갈 수도 없어 그곳에 텐트를 쳤다.


유하는 텐트를 지키고, 나는 물을 얻기 위해 마을로 향했다. 하지만 마을조차도 해변을 닮았는지 인기척이 거의 없었다. 폐업을 한 것 같은 식당 앞 수돗가에서 물이 나왔다. 물통 네 개의 뚜껑을 모두 열고 하나씩 채워나가는데 어두운 숲 속에서 한 사람이 나오며 “당신 뭐요~”라고 말했다. 억양이 센 전형적인 강원 동해안 말씨였다.


“물 좀 뜨려고요~, 도보여행하는데 요 앞 해변에서 야영을 할 거거든요.” 최대한 상냥히 말했다. 이에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펴며 “대한민국에서 물 뜬다고 죄는 아니지요”라고 받아쳤다. 얼굴이 붉은 끼가 많이 도는 것으로 보아 술을 많이 마신 듯 했다.


막 가려는 나를 “잠깐만, 잠깐만” 하며 불러 세우더니 “담배 한 대 피고 가요”라고 다짜고짜 담배를 권했다. 담배를 안 핀다고 사양을 했건만, 화가 난 사람처럼 소리쳤다. “아니, 담배 한 대 피우라니까.” 내 평생 처음으로 담배를 강요받은 것이다. 황당해서 그냥 가려는 찰나 또 “잠깐만, 잠깐만”하고 나를 붙들었다. 


“그럼 저기서 소주 한잔하고 가요” 황당했다. 누가 보아도 그는 만취해 있었는데, 낯선 나를 붙들고 소주를 한잔 하자고 하다니. 빨리 가봐야 된다고 잘라 말해도 그는 막무가내로 “일 잔만 하고가”라고 말했다.


그는 내 출신이 어딘지, 무얼 하고 있는지, 누구와 있는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대화할 상대가 없었던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안 돼 보이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얼른 그곳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갈게요, 바빠서요, 빨리 밥을 해야 하거든요, 더 어두워지기 전에요 등등 가겠다는 말만 몇 번 했는지 모르겠다. 그는 결국 “제가 거기로 가지요”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했다. 물론 나는 더 아랫마을에 텐트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귀신에 쫓기는 사람처럼 급한 걸음으로 돌아와 유하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그가 찾아올까 나도 유하도 불안했다. 버너에 불을 붙이고 냄비에 쌀과 물을 부어 밥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저 아래쪽에서 야영한다고 했으니까 여기로는 안올거야.” 유하를 안심시키던 찰나 그가 텐트 앞에 탁 서며 “사장님~ 여기 계셨네요!”라며 능청스럽게 거수경례를 한다.



대부분의 비수기의 동해안은 이처럼 뼈대만 앙상하다. 캠핑족에게는 천상의 장소이지만 가끔 성가신 일이 터질 수도 있다. 우리처럼...


우리가 텐트를 쳤던 근처...



아마 우리 표정은 귀신을 본 표정이었을 게다. 입은 탁 벌어지고, 가슴은 쿵쾅쿵쾅 뛰었다. 그의 외모가, 말투가 꼭 영화 속 ‘깡패’ 같았기 때문에 더 그랬다. 텐트 입구에 쪼그려 앉고는 주머니를 뒤져 소주병을 꺼냈다. 뚜껑을 비틀어 따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술 때문에, 억양 때문에 그의 말은 ‘현실적’으로 무서웠다.


그는 ‘병나발’을 불며 소주를 꿀꺽꿀꺽 마셨다. 주로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했다. 사는 게 무엇인지, 왜 사는 것인지 고민이 많은 것 같았다. “삶과 죽음의 차이는 뭐요? 종이 한 장 차이는 아닌 것 같은데…….”하는 식이었다. 횡설수설하는 그를 보내려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라는 말에도 꺾이지 않고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인생은 뭡니까?”라는 그의 말에 “미완성이요”라고 대답했다. 농담으로 던진 것이었지만 역시나 그는 진지했다. 텐트 안쪽을 살펴보던 그는 가방에 붙은 ‘생태’와 ‘평화’라는 글자를 찾아내고는 그것에 대한 질문을 쏟아냈다. 생태가 뭔지, 평화가 뭔지. 진짜 궁금한 건지 대화를 잇기 위해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바깥으로 얼굴을 내미는 시늉을 하며 “이제 어두워졌는데 가보셔야죠. 저희들 하루 종일 걸어서 피곤하거든요.”라고 그 전보다 훨씬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그는 표정이 돌변하며 “나도 갈 때를 압니다.”


결국 나도 질문을 던졌다. “아저씨는 원래 뭐 하시던 분인가요?”라는 질문에 “징역살이요”라고 대답했다. ‘징역’이라는 말을 잘 듣지 못해 몇 번이나 되물었다. 그러자 그는 “감옥살이를 했지요.”라고 고쳐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내가 감옥에 있을 때 양은이와 맞짱 떴었지.”라며 내 귀를 의심케 했다. 


또 나의 출신이 부산임을 몇 차례나 확인하면서 자기 친구들 중에 ‘칠성파’가 많다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아무래도 나의 ‘빨리가라’는 말에 협박 아닌 협박을 하는 것 같았다. 물론 술 취한 그와 바로 싸운다 하더라도 질 것 같진 않았다.


‘괴상한’ 말을 늘어놓는 그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가세요, 그만!” 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소주 두 모금만 마시고요.”라며 다시 꿀꺽 꿀꺽 소주를 마셨다. 분명 소주병에 소주가 2/3가 넘게 남았었지만 단 두 모금에 다 마셔버렸다. 그리고 담배를 한 대 더 피우더니 “내일 아침에 몇 시에 가요?” 엎친 데 덮친다는 상황이 아마 이럴 때 쓰는 것 아닐까. 


열시가 넘어서 간다고 얼버무리고는 그를 떠나보냈다. 유하와 나는 눈빛으로 금세 서로의 의중을 알아차리고는 짐을 싸기 시작했다. “민박에라도 가서 자야겠다.” 밤중에 와서 해코지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세상일 누가 알겠는가. 그렇게 허겁지겁 텐트를 걷고는 그곳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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