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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보호구역보다 아름다운 군사보호구역이라니...

도시를 떠나는 꿈

by 채색 2012. 12. 26.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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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비가 내렸다. 다음날 아침엔 비가 그칠 거라는 예보를 믿고 “내일은 떠날게요!”라고 잘라 말했었다. 삼 일을 염치없이 머무른 탓에 꼭 출발해야겠다 싶었다. 박그림 선생님과 사모님이 비가 온다고 하루 더 쉬어가라고 몇 번을 말렸지만…….


날이 밝아오면서 빗소리가 사라졌다. 다행이다 싶었는데 소변보러 간 화장실에서 충격적인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창밖으로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용해졌던 까닭이었다. 가야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을 했지만 빗길이 아니라 눈길을 걷는 건 좀 낫겠다 싶었다.


따뜻한 아침을 얻어먹고 길을 나섰다. 집 마당에선 소복소복 쌓이던 눈이 넓은 길에선 거센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판초우의도 크게 소용없었다. 바람에 뒤집히기 일쑤여서 꼭 붙들고 걸어야만 했다. 새벽까지 내리던 비 때문인지 쌓인 눈 아래를 밟을 때마다 물들이 사방으로 뻗쳤다. 바지가 흙탕물로 얼룩덜룩 물들었다. 차들이 빠른 속도로 걷어낸 눈+물도 고스란히 우리에게 튀었다.



유하


채색


파도가 맹렬히 몰아치던 낙산해수욕장



더 걷는 건 무리겠다 싶어 지나가던 버스를 잡아탔다. 멀지않은 낙산해수욕장에서 내렸다. 혹시나 야영이 가능할까 생각했었지만 결코 불가능한 날씨였다. 흙으로 된 곳은 온통 질퍽거렸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적당한 모텔을 잡을 수 있었다. 다행히 저렴한 가격으로!


바다는 높은 파도로 성이 나 있었고, 눈은 그칠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모처럼만에 낮잠을 실컷 잔 뒤 해질녘에 바다로 나가보았다. 눈도 그치고 하늘도 개어 있었다. 파도는 화가 가라앉지 않았는지 그대로여서 누구라도 집어삼킬 것 같았다. 그러나 모래만 가져갔다 다시 놓아두길 반복했다.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펴는 것처럼. 구경꾼들은 우리와 비슷한 여행객 몇몇과 비슷하지 않은 갈매기 떼들이 전부였다.


밝은 아침이었다. 해는 수평선에서 불쑥 올라왔다. 일찍부터 분주히 준비해 길을 나섰다. 해변으로 난 산책길을 걷다 해수욕장 끝에서 도로로 내팽개쳐졌다. 그 길 곳곳에는 문을 닫아 사람한명 얼씬거리지 않는 가게들이 많았다. 그 중에는 대형 콘도도 있었다. 이곳에도 사람 북적이던 때가 있었겠지? 


하구가 인상적이었던 남대천을 건너고 양 옆이 깊은 소나무 숲이었던 도로도 지났다. 밋밋한 길을 다 지나고 높지 않은 언덕을 넘었다. 다시 시야가 터지며 수 킬로에 달하는 해변이 펼쳐졌다. 다른 지역에 비해 펜션이니 횟집이니 하는 것들이 현저히 적었다. 


이곳의 정식명칭은 동호해수욕장이다. 해변 송림이 유난히 발달해 있었다. 오히려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는 낙산보다 더 울창한 것 같다. 불행히, 방문객이 적은 탓인지 그 흔한 공용벤치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냥 땅에 퍼질러 앉아 쉬며 점심을 해 먹었다.


남쪽으로 향했다. 다시 걷기 시작하자마자 차 한 대가 다가서더니 “이쪽은 길이 없어요.”라며 돌아가는 걸 권했다. 혹여나 숲길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어 향한 것이었다. 다시 돌아가야겠다 싶어 도로로 빠져나가는 길에 자꾸만 백사장이 눈에 걸렸다. 언덕에서 바라본 백사장은 수키로 미터나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발길을 돌렸다. 백사장으로 들어가는 철문은 열려진 상태. 수차례 봐 왔던 경고문이 붙여져 있긴 했지만 낮시간 동안에는 개방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돌아갈 이유는 없어보였다. 당당히 걸어 들어갔다. 



군사보호구역인줄 모르고 들어섰던 동호해수욕장


그곳엔 파도소리만 일렁거렸다.


아름다운 해변의 길이만도 수키로에 달한다.



아직까지 해변을 찾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다 동호해변은 썩 유명한 곳도 아니었다. 앞 뒤 수키로 미터 구간엔 갈매기와 우리밖에 없는 듯 느껴졌다. 육지방향으로는 길게 철조망이 쳐 져 있었지만 그 안쪽으로는 솔숲이었다. 숲그늘 속은 암흑 같았다. 지금까지 보고 느꼈던 해변과는 차원이 달랐다. 늘 건물들에 갇힌 해변만 봐 왔건만!


더 이상의 인공의 소리는 없었다. 거친 파도소리와 귓바퀴를 돌아나가는 바람소리밖에. 평소엔 걸을 때마다 푹푹 꺼지는 모래밭이 힘들게 만들었지만, 이때는 그것조차도 즐겼다. 배낭무게에 덕에 더 깊이, 더 더디 걸었건만. 이마에, 등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도 밉지 않았다.


즐거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눈앞에는 끝도 없을 것 같은 백사장이 여전했지만 작은 하천이 가로막았다. 스마트폰으로 찾아보니 ‘상운천’이다. 이대로 포기해야하나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돌려보길 몇 차례, 그러다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파도가 칠 때만 강이 잠기고 파도가 빠져나간 잠깐 사이에는 길이 열리는 것이었다. 모세가 이곳에서 지팡이를 수시로 내려치는 것일까. 신발과 양말을 다 벗고 기회를 노렸다. 파도는 무섭게 들어왔지만 빠져나갈 때는 어깨 쳐진 고시생 같았다.


“유하야 지금이야, 뛰어~” 비교적 작은 파도가 치고, 그 물이 다 빠져나갔을 때 소리쳤다. 물 온도는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발에 물이 닿자마자 나온 소리가 “아~ 차가바라” 이었다. 순간 멈칫 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 다음 파도가 닥치기 전에 뛰어야만 했다. 첨벙첨벙 뛰어가는 것도 어렵진 않았다. 강 속의 모래는 생각보다 단단했다.


그 때부턴 신발을 벗은 채로 걸었다. 생각해보니 동해를 따라 걸은 뒤 물과 모래를 직접 피부로 느낀 건 처음이었다. 아니 몇 년 만에 바다를 느꼈을 것이다. 머리가 굵어진 다음부터는 바다를 가까이 한 적이 거의 없었다. ‘촤~ 촤~’하는 파도소리, ‘사그락, 사그락’하는 발바닥의 느낌. 오직 그 때 뿐인 느낌과 경험이다.


이토록 개발이 안 된 해변은 처음이다. 게다가 해변을 따라 걸은 거리만 해도 1km 가 넘는 것 같다. 왼쪽에는 바다, 오른쪽에는 솔 숲,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새하얀 백사장! 동해안 일대의 자연스런 해변의 모습이 이 상태였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쓰렸다.


대부분 바다와 가까운 곳에 도로를 닦고, 그 뒤로 각종 숙식업소들이 건설되었다. 알려진 해변은 “오세요~ 싸게드릴게요~” 라는 호객을 위한 외침이 파도소리만큼이나 크고 잦다. 또, 작고 소박하던 마을은 펜션이나 모텔같은 시설이 들어와 경관을 망치는 경우가 많다. 자연스러운 해변은 그만큼 찾기 힘들었고,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서 있는 그 장소는, ‘적(북한군)’의 해안침투를 막기 위해 설치한 혐오스런 철조망 외에는 자연스러운 모습 그대로였다. 남과 북 사이의 비무장지대가 이렇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이 지역이 규모상 비교도 안될 만큼 좁겠지만 말이다. 생태를 보호해야하는 지역은 모두 군사보호구역으로 다 묶어버렸으면 하는 엉뚱한 생각을 잠깐 가지기도 했다. (군은 주둔한 지역에 비정상적으로 환경오염을 시키기도 한다)


서로 말 없이 천천히, 달팽이가 된 것 마냥 느릿느릿 걸었다. 이 낭만이 언제 끝날지 몰랐고, 끝나버리면 너무나 아쉬울 게 뻔했기 때문이다. 이런 해변은 그 어디도 없다는 걸 경험상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는 황당하게 다가왔다. 



군사보호구역 주변에는 훼손되지 않은 해안습지도 남아있다.



“어이~!” 솔 숲 경계 사이에 있는 군사소초에서 들렸다. 손톱만한 크기의 사람이 손을 머리위로 흔들며 우릴 부르고 있었다. 그 소초를 중심으로 양편으로 철조망이 쳐 져 있는걸 보니 우린 군사지역 내에 있는 게 분명했다. ‘안 보이는 곳에서 좀 앉아 놀기라도 할 걸’ 아쉬움이 밀려왔지만 별 수 없었다.


소초로 향하는 걸음도 느릿느릿. 그곳까지 5분은 걸려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여기 걸어가면 안 되는 곳이에요?”, “네, 경고문구 못 보셨나요? 여기는 군사지역입니다.”, “아~ 따로 안막아 놔서 잘 몰랐어요.”,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 왔지만, 나갈 때는 마음대로 못나갑니다.” 말끔한 군복차림의 중사 두 명은 비교적 다정스럽게, 장난을 섞어 이야기 했다. 유하는 그 말에 약간 긴장한 것 같았다. 


“수돗가에서 발 씻고, 저쪽 길로 나가세요.” 잘 됐다 싶었다. 발은 바닷물에 적신 탓에 바로 신발을 신기는 찜찜한 터였다. 내려진 내 가방을 들어보더니 “완전 군장보다 더 무겁겠네~” 라며 친한 척을 한다. 우리들 주변엔 관심만 많은 병사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전투화를 닦고 있는 모습, 청소를 하는 모습들이 나의 군 생활을 생각나게 했다.


병사 한 명의 안내를 받아 그곳을 빠져나왔다. 아쉬웠지만 그 정도 걸은 것만으로도 특별한 경험이었다. 다행히 솔 밭 사이를 통과하는 길이 있어 걷기엔 여전히 좋았다. 갈대습지가 군데군데 펼쳐져 있어 ‘역시나’였다. 군사 활동은 최고의 파괴를 불러일으키지만 때때로는 보호의 역할도 한다는 게 아이러니였다. 이곳이 자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는 낙산해수욕장보다도 더 아름답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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