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농사를 단 한번도 지어본 적이 없습니다. 길러본 식물이라고는 콩나물? 정도나 될까요? 엄밀히 말하면 콩나물도 자기가 자란 것이지 제가 기른 건 아니죠. 단지 조건만 만들어줬을 뿐입니다. 


작년 9월에 봉화로 귀농을 했습니다. 어려운 과정 끝에 농사지을 땅을 구했습니다. 밭이 240평정도 논이 640평정도 됩니다. 볕이 정말 잘 들고, 기름진(기름져 보이는) 땅입니다. 매일같이 이렇게 좋은 땅을 구할 수 있게 해준 많은 분들께 '참 고맙다...'라고 혼잣말을 할 정도입니다. 


얼마전 날씨가 따뜻한 날을 골라 작년에 씌워놓았던 비닐 멀칭을 벗겨냈습니다. 그랬더니 비닐에 감춰져 있던 밭 이랑들이 확연히 드러났습니다. 또, 드디어 농사를 지을 것이라는 마음도 뚜렷하게 드러났죠. 


무엇을 심을까 고민이 되었습니다. 이 질문은 제가 귀농하겠다는 말을 들은 사람들이 어김없이 던진 것이기도 합니다. 다들 걱정반 궁금증반으로 말입니다. 농사가 쉽지않은 것은 그들도 알고, 저도 알고, 하늘도 아는 일입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구체적인 계획이 잡혀있지 않았던 터라,


"그래, 내년에 농사 지을 건 정하셨어요?"

라는 질문에,


"네... 아니.. 아직..예.. 아니요..음... 벼하고 조나 수수하고... 상추, 배추, 감자, 고구마.. 같은 채소류하고요..."


라는 식으로 얼버무렸습니다. 그러면 상대편은 걱정스런 눈빛을 보낸 뒤 말을 아꼈습니다. 왜냐하면 묻는 사람도 농사를 안 지어보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농사를 지어본 사람들, 특히 시골 어르신들 중 많은 수가 '젊은데 못할게 뭐있어'라는 식으로 조언을 해주셨어요^^)


그 때문에 더욱 더 고민에 고민을 했습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그저 매일같이 먹고 있던 쌀,보리,수수,배추,상추,고추... 같은 것들 뿐이었습니다. 생각해보려해도 떠오르질 않았죠. 사실상 그렇게 농사를 지으면 되는 것임에도요.


사람들이 조언하길,

"그 지역에 가서 주변에 나는 걸 알아봐라. 각 지역별로 날씨도, 땅도, 지형도 다 다르니까." 

"장날 재래시장을 둘러봐라. 그럼 그 지역에서 무엇이 나는 지 알 수 있다."




며칠 전의 봉화시장 장날 모습. 추운 겨울이 되자 채소를 파는 할머니들의 모습도 물건을 사는 손님들의 모습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마트는 늘 붐비는 것에 반해)


어떻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들이지만 저는 '장날 재래시장'까지는 생각못했죠. 도시에서 계속 살아온 인간에게 할머니들이 직접 기른 곡식과 채소들을 가지고 나오는 '시골 장날'을 떠올리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3개월 동안 필요한 식료품이 있으면 언제나 장에 나갔습니다. 이곳 봉화는 대형 마트는 아예 없고, 조금 큰 '슈퍼마켓'이 있긴합니다. 그런덴 거의 가지 않았습니다. 인스턴트 식품을 사야만 하는 때만 가끔 이용했죠. (사실, 장날에 나온 싸고 싱싱한 채소를 두고 냉장고에 쳐박혀 있는 채소를 살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조언대로, 예상대로 시장 골목을 채우고 있는 할머니들 앞자리에는 우리 지역에서 난 채소들이 즐비했습니다. 역시나 다른 지역에서 가져온 것을 파는 분도 계셨습니다만, 구분하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잘 포장이 되어있거나 다듬어져 있는 것들은 거의가 타지역에서 나온 것이고, 할머니들이 직접 키워오신 것들은 모양도 지멋대로인데다 흙도 덕지덕지 붙어있었습니다. 마트에 있었다면 상품성이 떨어져 팔리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것들이었죠. 


시장을 갈 때마다 눈여겨 보았습니다. 결과는 어떨까요? 신기하게도 우리 지역에 나오지 않는 것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늘 먹는 것들은 늘 나와 있었습니다. 모두 할머니들 텃밭에서 나온 것으로요! 


콩 종류는 물론이고 고구마, 감자는 너무나 흔하고, 양파나 생강, 마늘, 무우, 당근, 고추, 오이, 호박... 


여기서 농사를 지어보신분은 반박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정도는 우리나라 어디든 다 나오는 것들이야~" 


아마 큰 지역, 기후보다는 직접 심겨질 땅의 상태에 따라서 어떤 곡류, 채소가 잘 자랄지 결정되겠지요. 물이 많은 곳에서 자라는 식물들, 적은 곳에서 자라는 식물, 볕이 잘드는 곳에서 잘 자라는 식물이나 잘 들지 않아도 잘 자라는 식물 등이 구분되겠지요.


재래시장을 쏘다니며 얻은 교훈이자 결론은, 일단 먹고싶은 곡식, 채소를 다 심어보자는 것입니다! (참고로 저희들은 농사로 돈을 벌 생각이 별로 없습니다.^^a)



- 곡물 7가지 : 벼, 조, 기장, 수수, 옥수수, 밀, 보리

- 콩류 4가지 : 서리태, 메주콩, 완두콩, 땅콩

- 뿌리채소 10가지 : 감자, 고구마, 연, 양파, 생강, 마늘, 무, 총각무, 당근, 우엉

- 과실채소 6가지 : 토마토, 고추, 오이, 호박, 수박, 참외

- 잎채소 6가지 : 대파, 배추, 상추, 양배추, 쑥갓, 갓

- 약용작물 2가지 : 도라지, 더덕

- 유지작물 2가지 : 참깨, 들깨

- 과실나무 6가지 : 감나무, 사과나무, 대추나무, 호두나무, 자두나무, 복숭아나무



해서, 총 41가지 종류입니다. 놀랍죠? 


"저것들 미친거 아냐? 농사를 쥐뿔만큼도 모르는 놈들이 계획이라고 세운게..."


라는 비판의 목소리와,


"뭐, 해보라지!"


라는 응원이 동시에 들리네요. ^^


당연하게도, 이 겨울동안 41가지 곡식, 채소의 씨앗을 다 구하지 못할 것입니다. 구해지는 것만으로 심겠죠. 그래도 많기는 할 것입니다. 작물에 따라서 두둑을 높여주거나 고랑을 더 파거나, 서로 부딪히지 않도록 충분히 폭을 넓혀주거나 웃거름을 더 자주 주어야 한다거나. 병충해의 종류도 달라서 대응하는 방법도 수십가지가 되겠죠!


지난 달부터 열심히 씨앗을 구하고, 관련 책자를 찾아보고 있으며, 마을 어르신들을 곧 찾아뵐 계획입니다.(집과 땅이 8km 정도 떨어져 있어서 땅이 있는 마을 어르신들에게는 인사를 아직 못드렸네요. 눈이 녹아야 가거든요!) 그러면 '막무가내' 계획이 좀 더 뼈대를 갖추게 되겠죠. 최고의 방법은 머니머니해도 마을 어르신들로부터 토종씨앗을 얻고 재배방법을 배우는 것이겠죠. ^^ (그건 진짜 소원임~)


올해부터 본격적인 '귀농'이 시작되니, 마음이 두근두근, 기대가 많이 됩니다.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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