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방울님이 급히 앞서 걷더니 비닐하우스 안으로 들어갔다. 금세 뭔가를 들고 나왔다. 임인환 농부님이 “해뜨기 전 새벽에 딴 딸기가 참 맛나거든요” 라고 했던게 생각났다. 고개를 꾸벅이며 감사하단 말을 전하고 얼른 씹었다. 정말이었다. 새벽에 딴 딸기가 맛있다는 말.
두물머리를 빠져나오는 길에 ‘느티나무가 있는 두물머리’에 들렀다. 진짜 두물머리에는 인기척도 없어서 밭 한 켠에 오줌을 갈길 정도였다. 이곳엔 해가 뜨며 밝아진 흰 하늘에 비친 사람 그림자가 많다. 사진기를 삼각대에 받치고서 빛을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짙은 구름 때문인지 사진기들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이들이 이렇게 빛을 기다리고 사진을 찍는 열렬한 노력을 조금이라도 ‘진짜 두물머리’가 소중하게 보전될 수 있도록 보태진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이내 그 생각을 접었다. 그곳은 거대하고 단단한 바위로 강으로 부터 띄워놓았고, 주변엔 상인들이 가득했다. 진짜 두물머리에 개발사업이 들어온다면 이런 모습이 될 터였다. 개발이 된 후에나 이런 사람들이 모이기 마련이다.
▲ 흔히 관광객들이 찾는 '느티나무가 있는 두물머리'. 사실 이곳은 두물이 만나지 않는다. 조금 더 하류로 간 곳에서 두물이 만난다. 그곳은 농민들이 정부와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곳이다. 사진 찍는 분들의 노력이 조금만이라도 그들의 싸움에 보탬이 되었으면.
전철로 세정거장이나 건너뛰었다. 양수역에서 아신역까지. 그 사이는 빠른 자동차길과 4대강 사업으로 만들어진 자전거길이 있는 곳이다. 4대강 사업으로 만든 길은 일부러 피하고 싶었다. 그래도 아신역에서 내린 것은 더이상 간다면 도보여행의 의미가 퇴색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신역부터 4대강 자전거길을 걷게 되었다. 곳곳에 자전거 길 안내판이 걸려있었다. 그 안내판에 따르면 이 길은 낙동강 하구둑까지 이르게 되어 있었다. 인천에서 부산까지 633km. 이 길만 그대로 따라가면 내 고향 부산까지도 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만약 4대강 사업과 별개로, 강의 파괴를 수반하지 않고 이 길이 만들어졌다면 찬성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자전거 도로를 화려하게 만들지라도 자동차 도로에 비할 것이 못되기 때문이다. 철도의 폐선로를 이용하고, 기존의 둑방길을 활용하는 것 정도는 파괴를 할 것도 없다. 당연히 이런 레져용 도로보다는 도심 내에서 이동할 수 있는 도로가 우선되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양평을 지난 뒤, 강변의 이편 저편은 국적을 알 수 없는 주택들이 즐비했다. 어떤 것은 지중해풍이었고, 어떤것은 유럽식 주택이었다. 특히나 미국식 목조주택이 가장 많았다. 얼핏보면 외국의 어딘가를 보는 듯 했지만, 외국 어디를 가 봐도 저런 풍경은 없을 것만 같았다. 각자 집들의 개성은 있었지만,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인형주택이라고나 할까?
그도 그럴것이 둑방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보아도 돌아오는 게 없었다. 도시인, 그것도 대도시인들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다. 양평이라면 서울과는 한참이나 떨어진 이곳에는 ‘인간미’가 살아 있을거라고 생각했었다. 큰 착오였다.
▲ 둑방길을 활용해 만든 자전거길. 이런 길이라면 환영한다. 다만, 정부는 온갖 파괴와 악행을 저지른 뒤에, 언제든 할 수 있었던 이 '자전거길 사업'을 내세우며 자랑삼지 않았으면 좋겠다.
▲ 양평일대의 전원주택마을. 국적을 알 수 없는, 어울리지 않는 집들로 가득하다. 마치 '인형주택' 같다.
유하는 발 때문에 계속 쩔뚝거렸다. 나도 발바닥에 물집이 잡힌 듯 했지만 그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다가 개군산 고개를 넘는 길에서 결국 그녀의 발바닥 물집이 터져버렸다. 그 때부터는 반 절름발이가 되어버렸다. 차라리 등산화보다는 샌들이 낫겠다싶어 그것으로 갈아신었다. 정신없이 고개를 거의 지나고 나니 나무들 사이로 어렴풋이 이포보가 보였다.
때마침 비가 내렸다. 큰 비는 아니었지만 젖으면 곤란해 지기에 판초우의를 꺼내 입었다. 비 예보가 없었던걸 생각해보니 이 비는 ‘강의 눈물’이 아닌가 싶었다. 뼈를 깎는 수술을 거친 강이 우리에게 슬픔을 표현하는 것이다. 마음이 착찹해졌다.
4대강 사업은 너무나도 무식한 사업이다. 강을 살리겠다는 구호를 외치며 시작된 사업은, 수심 6m를 유지하기 위해 강바닥을 파 내고 보를 세웠다. 이 보는 구조만 보이지 규모면에서는 댐에 필적한다. 이 사업의 본격적인 시작점이 이곳 개군산 아래서부터다.
이포보가 가까워지자 발의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래전 생겨난 가슴속 응어리가 통증을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환경단체인 녹색연합에서 활동 당시 이곳 남한강을 수십번도 더 드나들었었다. 그 당시, 파괴되기 전부터 파괴가 되는 과정을 생생히 지켜보았다. 내 역할이 파괴되는 과정을 모니터링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을 응어리가 생겼다. 강을 가로지르는 둑을 쌓고 그 안의 모래를 다 파냈다. 강 주변의 생명이 가득한 숲을 다 깎아버리고 잘라냈다. 그로인해 강에 깃들어 살던 생명들은 비참히 죽어갔다. 그 모습을 내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고,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 이포보가 보이기 시작하자 비가 내렸다. '강의 눈물'이 아닐까. 반듯하게 깎여지고 메마른 둔치가 어마어마한 파괴가 있었다는 걸 말해준다.
▲ 이포보는 7명의 악마가 백로를 '물고문'하는 듯한 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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